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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유의호 편집국장 | 기사입력 2022/12/05 [11:28]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유의호 편집국장 | 입력 : 2022/12/05 [11:28]

 유의호 편집국장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소설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렉산드로 푸시킨이 남긴 명시이다.

 

고사성어인 ‘고진감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명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역경을 극복하면 행복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본 시는 삶의 주체가 누구인지 삶을 인칭의 대명사로 묘사하면서 또 다시 내 삶을 혼란스럽게 한다.

 

삶의 주체가 내 삶인지 남의 삶인지 불분명하다. 삶은 고유의 내 영역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것, 살아 가는 것, 생명 그 자체인 내 목숨의 주체이자 주인이 곧 나의 삶이다.

 

‘삶이 그대를 속인다’라고 전제한다면 곧바로 모순의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다면 삶의 주체적 오해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삶이 나를 속인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자면 내가 노력한만큼 기대한 만큼의 댓가가 뒤따르지 않을 때 나를 위로 하기 위한 피난처같은 말의 유희다.

 

원초적 삶의 근원을 따져보기 전에는 삶이 지니고 있는 그 무게감과 속성에 대해 단순히 접근하기 어렵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말문이 막히듯 우리의 삶은 누구도 쉽게 정의할 수가 없다.

 

역설하자면 내 삶이 내가 주체요 내가 주도한다면 삶이 나를 속일 수 없다.

 

결국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명시중에 명시로 꼽히는 본 詩 또한 또한번 희망과 기대감을 절망으로, 절망속에서 허탈한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불행의 끝은 행복이라고 단정지움으로서 막연하나마 살아야 할 용기를 얻게 하는 것일 뿐 결과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詩題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필자는 이 명시를 평가(시평)하기 위해 펜을 든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 우리 삶은 ‘희노애락’이라는 네 글자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을 뿐임을 분명히 하고자 할 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허와 무’에서 출발해 허무로 마감함에 어느누구도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으며 이를 순리요 자연의 이치로 순응하며 살아 가고 있는게 사실이다.

 

내 목숨 내 생명 내 생사여탈은 그 누군가에게 저당 잡힌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따라서 내 삶을 지배당한채 살것인가 지배에서 해방될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이 또한 ‘이율배반’이라 하겟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내 삶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삶이 나를 속일 수 없으며 비로소 온전한 내 삶을 구가 할 수 있슴이다.

 

다만 억조 창생이 태어나면서부터 내 삶을 지배당한채 살아왔기에 그 지배를 당연시 하면서 인간은 요행을 바라며 살아가고 스스로 자위하며 먼 훗날의 행복을 막연히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를 자각할 때 내 삶이 전환되며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오늘이 있어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어 내일이 있기에 어제와 내일은 이미 삭제 된 과거형이자 미래 완료형이 바로 오늘이다.

 

촌음을 아껴 오늘에 충실하면 그 결과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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