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느낌과 익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드는 것은 일상적인 세월을 먹는 것이지만 익는다는 것은 그 세월을 먹어 내 마음에 자리매김 할 때 비로소 깨달음이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살다 보면 문득 내가 늙어감을 발견하게 되고 발견하면 삶의 방향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눈물로 짙어지고 한숨도 속 깊은 곳에서 소리 내지도 못한 채 신음한다.
삶이란 그렇다. 마냥 오늘에 기대어 맹목적으로 살면서 그것을 목적으로 믿고 쉼표 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내가 이 나이쯤 세월을 삼켰나 싶다.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길, 그 길 위에 서서 뒤안길을 바라보면 안쓰러운 내 모습이 보인다.
벌거 벗은 채 황량한 들판에서 고독이란 등짐을 지고 홀로 걸어가는 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다. 길 없는 세상에 와서 길을 내고 답 없는 세상에서 답을 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가 참으로 기특하기도 가련하기도 하다.
출발은 했지만 정점이 없는 세상이기에 내 다리 힘 풀려 주저앉는 그 자리가 내 종점이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운명은 믿고 안 믿는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기에 애써 논란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너나 없이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그 무엇도 이를 거스를 수는 없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사람은 태어나 너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다 종당에는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갖기 위해 온갖 험한 꼴을 보이며 비록 차지했지만 그 갖음이 나를 참혹한 몰골로 괴물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 사실 앞에 서고 보면 모든 게 허허실실임을 깨닫고 훌훌 털어 버리게 된다.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서정주 시인의 싯귀 중 일부다. 소쩍새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필자는 이 시에서 우리네 인생이 소쩍새와 다를 바 없음이 느껴진다.
밤새도록 울고 ‘누가 죽었소’ 한다 듯이 우리네 삶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린 후 끝자락에서 내 초라한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느끼며 세월이 농익어 나를 거울 앞에 세우니 내 모습이 드디어 보인다. 성경에 욥이 ‘내가 하나님을 귀로 들었었는데 이제야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우리의 삶은 귀가 얇아 듣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한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후 욥이 ‘이제야’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듯이 지금 우리의 삶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하려면 내 생각 내 옮음을 끊어내야 한다.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생을 허투로 살만한 여유가 없다. 진지하게 고민하라. 고민함이 없으면 누구나 가는 그 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는 카테고리에 자신을 가둬두고 살게 아니라 그 갇혀진 사고에서 지금 벗어나라.
나이가 벼슬인 양 먹어 갈게 아니라 남은 여생은 헛된 꿈에서 벗어나 돌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너무 늦으면 돌아갈 길은 멀어진다.
억조창생이 왔다 간 이 길은 내가 찾는 길이거나 내가 갈 길은 아니다. 더구나 이름 석자 남기기 위해 이 험한 세상에 온 것도 아니다. 죽어 자신의 이름이 회자 된다 한들 그것이 나를 위로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했다. 죽어서 무덤 앞에 세워놓은 비석(빗돌)에 새겨놓은 공적은 그저 흔적에 불과하고 나의 족적일 뿐이다.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역사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다 해도 자신을 능히 구원하는 문제와는 별개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사람의 눈높이에 의해 평가 받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은 맘껏 먹고 마시고 종족을 번식하고 죽으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만 인간은 맘껏 먹고 마시고 욕망의 오감을 모두 충족 시킨다 해도 언제나 춥고 배고프다. 그 이유가 동물의 본능이라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일반 동물과는 전혀 다른 영혼이라는 실체가 내재 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를 배부르게 한다 해도 배부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영혼이라는 뱃골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그 답을 상학에서 찾아야 하며 해법도 상학적이어야 한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양서도 첨단 과학도 이 뱃골을 메꾸지 못한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첨단이라는 실체는 육체의 양식에 불과함을 깨닫는다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주문했다.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있다면 세상을 구제하고도 남는다.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떡은 유한하고 말씀은 무한하다. 말씀의 핵심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게 아니다’라는 그 한마디로 정리된다. ‘말씀’이 가리키는 것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떡’임은 분명하다.
그 떡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떡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한 나의 존재를 깨우고 살리는 일임을 말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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