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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 14:37
 

데스크칼럼 Deskcolumn
 

[詩論] 예수의 정치력을 배워라 (2017-09-28)
한국정치가 선진화되려면 돌을 내려놔야

“죄 없는 자는 먼저 돌로 치라”
예수의 행적 가운데 유명한 한 일화(요8:7)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에게로 끌고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처단해야 되겠느냐’고 예수께 물었다.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없고 보면 당연히 이 여인을 돌로 쳐 사형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을 옭아 매고 있는 율법(법률)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구세주로 왔다고 말했다.
따라서 예수의 실체는 사랑 그 자체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했으니 자칫 예수의 결정이 극단으로 몰려 이율배반으로 낙인될 처지였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 여인을 예수께 데려와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용서하라면 당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죽이라 한다면 용서와 사랑을 부르짖는 예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될 처지다. 그때 예수는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다. 이 여인은 죄를 짓다 붙잡혀 죄가 들어났고 이를 정죄하여 예수에게 심판을 요구하는 이들은 눈에 들어나지 않을 뿐 그 여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죄인에 불과했다. 숨쉬고 사는 동안 죄와 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 단 한명도 있을 수 없음이다.
예수는 끌고온 자들에게 죄 없는자가 있다면 너희가 심판하라며 그 여인을 그들 손에 내주었다.
예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내가 그 여인을 정죄하면 나를 내가 정죄함이 된다는 사실 앞에 유구무언이 돼버렸다. 그들은 돌아갔다. ‘저들이 너를 정죄치 않았으니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고 예수는 말했다.
정죄는 정죄를 낳는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고 했다. 그 완성은 역설하자면 폐기처분을 의미한다.
이미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지 못하는 율법은 그 순간 유명무실해 율법아래서 옳고 그름을 논하고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고 천국과 지옥을 가르침이 예수 이전까지는 합당한 근거 였지만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는대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다.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불완전한 것이 폐한다’ 했듯이 율법은 작금의 법률과 다를 바 없는 인간 다스림의 형식에 불과했다고 보면 틀린말이 아니다.
지킬 수 없는 법,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법, 늘 먹어도 배고픈 법, 죄를 지어도 들어나지 않으면 처벌도 못하는 법 그것이 율법이고 그 법을 수천년동안 지키며 그 법대로 인간을 처리해왔다.
지금 이세상이 끊임없이 악순환 되는 것도 이 율법에 근거한 국가를 경영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겠다고 나서는 까닭이며 법이 약해 질서가 무너지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입법, 초법이 생산되고 보면 이것이야 말로 인간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고 ‘자승자박’하는 꼴이 아닌가 싶다.
끄집어내고 파헤치고 처단하고…
빛이 강하면 어두움은 더욱 짙은 어둠으로 지하로 내려갈 뿐이다.
예수는 분명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했지 “죄를 씯는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류와 인간의 죄의 댓가는 그 스스로 짊어지고 가버렸다.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예수가 자기피를 뿌려 자기생명을 던져 뭇 생명들을 살린 것처럼 나라가 잘되고 행복하려면 위정자들이 먼저 자기희생을 통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안고 가야한다. 그것이 나라사랑 국민사랑이다. 관용과 이해와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율법이 앞에서 판을 쳐서는 안된다.
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을 정죄함이 목적이 된다면 이세상은 결코 암흑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서로 물고 물리며 법을 앞세워 법을 움켜진 자들이 법을 만든 자도 나라의 임금도 법 앞에서 무색케 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자기희생 없이 법의 힘을 내세워서 치리를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닥칠 권불세도 10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범죄 투성이고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이 항상 악함을 보고 인간지음을 한탄하고 노아를 통해 물로서 세상을 심판했다고 적고 있다. 이 항상 악함의 뿌리가 곧 너나 할 것 없는 우리이고 보면 가장 현명한 처사는 그 출발이 용서와 관용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죄에 대한 응징을 위해 온 게 아니라 그 죄를 대신하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고 구원함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라가 잘되고 치리권자들의 성군의 자격이 이에서 시작된다면 예수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그 누구도 곧 예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백척간두’의 위기감 속에서 한치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밤새안녕’ 시기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한국이라는 6개국이 상호 첨예한 이해 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지키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에서 정치권은 매일같이 과거사에 매달려 연일 감사니, 수사니, 구속이니 하며 과거사 청산만이 마치 살길인 것처럼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국가의 안위가 안보에 있고 안보위기 상황에서 정치권이 할 일은 따로국밥이 아니다. 합일의 통일된 모습으로 한목소리를 낼때다.
서로 이전투구를 일삼으면서 어떻게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 했다. 지금은 소리내어 다툴때가 아니다. 정치권이 이처럼 벅벅소리 지르며 당리당략과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정치권은 김정은과 모종의 평화협정(?) 이라도 맺고 그것을 국민들만 모르는게 아닌가 싶을 따름이다.
털어야 될것과 짚어야 할게 있다. 파산돼 길거리에 나앉은 빚쟁이에게 돈내놓으라고 떠들어봤자 악만남은 빚쟁이는 악악 거릴게 뻔하고 채권자는 콩밥이라도 먹이고 싶은 심정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맞게 밀고 당겨야 한다.
우리 정치권은 집권당과 야당의 역할을 ‘갑과을’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보면 헌정사상 여야의 대립은 정해진 수순과 같이 단 한번도 제대로 된 협치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주객이 전도되면 마치 보복하듯 새 정치가 시작되는 모습은 산책동자도 아는 목차에 따라 진행된다. 그 이유는 집권당이나 그 주변이 대통령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대통령도 관용과 화해와 용서 속에서 협치를 해나갈 것인데 정반대의 주문들을 하고 있다보니 결과는 늘 ‘버킹검’에서 못 벗어나게 된다.
지금 여야가 극한대결로 치닫고 협치가 이뤄지지 않음은 본래의 속성(기능)이 그렇겠지만 ‘부자의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가진자가 좀더 여유있는 정치에 임하길 차제에 주문하고 싶다.

유 의 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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