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성악설, 성무 선악설 - 一理(일리)에 불과
만고불변의 원칙에 도전해야 변할 수 있다 내가 나에게서 벗어나야 자유를 얻는다
선한 사람은 악해질 수는 있어도 악한 사람은 결코 선해지기 어렵다.개과천선’이란 단어는 잘못을 고쳐 선하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보면 옳다. 숫하게 다짐을 해도 다짐뿐 ‘개과’는 되지 않는다.
‘변한다’ ‘아니다’라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며 ‘성선설’과 ‘성악설’을 만들어 논쟁을 해오고 있지만 이 또한 둘 다 모순이 있다.인간은 스스로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되다만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고등동물 이상의 능력을 갖고 탄생됐다.
물론 진화를 통해 영리해진 부분들도 있지만 그것은 진화가 아닌 발전할 수 있는 성장에너지라는 DNA가 본래부터 잠재돼 있었기 때문이라 봄이 옳다. 따라서 인간은 인류의 주인으로 처음부터 자리 매김 됐음을 부정할 수 가 없다.
하지만 사람에겐 치명적 한계라는 인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결코 사람들이 갖길 원하는 신성에는 미칠 수가 없다.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인성과 신성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
혹여 이렇다.
인성은 인간이 정할 수 있는 성질로서 다듬어 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그 인성이 교육을 통해 신성화 즉 성화작용은 일어 날 수 없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난 삶은 천지개벽이 된다한들 가능치 않는 부분이다.따라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결코 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표면상 착하고 악할 뿐 내면은 동일하다. 어찌 보면 ‘선과악’은 구분되어 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 돼 있다는 점이다.
선의 기준과 악의 기준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악을 행하느냐에 따라 그 악이 선이 되고 반하여 선도 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인간은 그 목적에 희생물이다. 역설컨대 그 목적에 의해 준비해놓은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존재가치보다 존엄성은 이미 배제 된 상태로 봐야한다.
참 어려운 형이상학적 논리 같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현실에 부합한 인간史로 수용할 때 비로소 선과악 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 열릴 것이라 확신한다.
‘공수래공수거’가 인간 삶의 전부로 알고 물레방아 도는 인생을 빗대 노래하다 떠난다면 후회보다는 두려움에 치를 떨게 된다.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하늘의 섭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는 받아들임이 아니라 스스로 숙명의 블랙홀로 뛰어드는 격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해법은 하나다. 도전하는 것이다.
죽음에 순종하거나 선악논리에 순응하면 억지적 삶에 발이 묶여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위대한 인간의 자각능력을 집약시켜 인간의 한계적 굴레에서 벗어나야한다. 이것이 도전의 목표다.
인간은 단 한 번도 기존의 삶을 거부하고 제 2의 삶에 도전한 적이 없다. 이를 설천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으로 치부하며 살아 왔다.
인류가 있은 이후로 모든 인간이 순응에 길들여져 왔을 뿐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살다가는 것에 길들여지고 보니 누구나 별 수 없는 허접함으로 인생을 마무리 짓고 만다. 이 대목에서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창세기 3장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됐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24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 내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결국 하나님이 인간의 영생을 방해했다는 결론이다. ‘선악을 알고 생명과일을 먹으면 영생한다’라는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물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좀 더 새겨봐야 겠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되 목적에 의해 만들었으며 그 목적이 빗나감(?)에 따라 인간은 영생에 반하는 사망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이를 자연의 이치로 순응함에 따라 인간존재 가치는 말살되고 말았다는 전제가 성립된다.
인간은 어떤 노력도 어떤 선도 영생이라는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직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역설하자면 인간은 신에 의해 탄생과 죽음 그리고 기다림(?)속에서 뻔한 길을 갈뿐이다.우리는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매듭지으면서도 끝없이 우리의 영혼은 노예가 되어 살아감에 반발하지 않는다.
이로인해 인간의 삶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죽음의 노래를 부르다 원망 가득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도전하라. 그리고 반발하라. 우리가 믿고 알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나를 블랙홀에서 건져내지를 못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진리는 신의 섭리를 깨닫는 게 아니라 내가 석가모니가 되고 예수가 되고 하나님의 존재가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섭리다.
무엇을 믿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서 벗어나야 된다’ 그것이 구원이다. 무엇을 섬겨 내가 구원을 얻으면 나는 늘 구원자와 피구원자로 주종간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원을 얻었어도 나는 나에겐 자유함이 없다 늘 빚진 자가 된다. 다시 한 번 역설하자면 ‘그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됐으니… 영생할까 하노라’
즉 영생의 조건이 선악을 아는 일(선악과를 따먹고)이고 둘째는 생명과일을 따먹는 일이다. 둘째 조건만 갖추면 인간은 영생한다는 의미다.
출발선이 정해졌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금껏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회개하며 이를 원죄로 삼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혀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실제 기독교 교리다. 어떤 종교도 마찬가지다. ‘유불선’을 합해 놓아도 결론은 하나로 통한다.
진정한 결론은 인간이 성선설이나 성악설에 기초를 두고 출발하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시작부터 선악이 함께 내재돼 있고 그 선악은 신성의 근간이며 인성은 삶의 규범이나 규칙이다.
이를 완벽히 지킬 수 있다고 해서 선하다 하거나 구원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선의 기준은 악이요. 악의 기준은 선인데 그 기준을 구분해서는 답을 구할 수 없다.
만일 구분한다면 선의 시작지점은 어디이며 악의 출발지점은 또한 어디인가를 발견해야 된다. 선악의 시작점은 ‘하나’이다.
선악중 하나를 걸러내야 한다는 강박적인 윤리 또는 종교관에 머무는 동안 선악은 충돌하게 되고 천국과 지옥이 등장하고 인간은 심판이라는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함정이다. 스스로 파놓은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만다.
작금의 삶의 이렇다. 과감하게 이 틀을, 이 허상을 벗어나야 내가 신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다.
유의호 <편집국장 | 2021/02/16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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