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어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았다고 느껴지지 않을때 그땐 비록 숨은 쉴 지언정 이미 죽은 목숨일게다. 왕왕 그럴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하지만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이 점점 떨어진다면 그땐 돌이키기 힘들만큼 너무많이 와 버린 때 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느 정점이란 것이 누구나 있게 마련이지만 나의 정점은 내가 무기력해질때 부터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자리 그 시간이 무덤이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살아있지만 죽은 자가 된다. 100세 시대의 정점이 100세가 아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사회에 동참해 내 역할을 할 때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따라주지 못할 때 그 때부터 갈림길로 접어든다. 분명한 것은 마음과 육신이 분리되는 시점부터 점점 시속이 떨어지게되고 이보다도 마음이 쉬고싶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그때부터가 제2의 인생 그로기 상태가 되고 인생말년 자폐증을 앓게 된다. 한번 주저앉고 보면 쉽게 재기하기 어렵다. 몸보다 마음이 자리보존하고 누워버리면 좀체 일으켜 세우기 어렵다. 인생은 살다보면 한 두 발짝 씩 쉬었다 가는것도 사는 방법이고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경우도 있으나 누운자리가 영원한 장막성이 될 수 있음을 간과 하지 말아야 한다. 살면서 내 의견을 개진하고 내 의지대로 길을 걷고 많은 이들과 동행할때는 그 자체가 행복인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길을 걷다 하나둘 말벗들이 어디론가 떠나가고 어느날 덩그러니 혼자임을 깨달을때 얼마나 공포스럽고 고독한가를 느껴보았는가! 항상 그들이 내곁에 있을것이란 당연함이 그들이 떠난 후에야 아니었음을 직감하게 되고 애석함과 안타까움에 몸둘바를 모르지만 한 발 더 내디뎌 생각해보면 그들이 곧 ‘나’임을 인지케 된다. 우리의 생이 그렇다. 참으로 덧없다. 내 삶에 욕심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싶다. 결국 시한부의 인생을 살다갈 것임에도 극구 이를 부인하고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 싯귀처럼 아등바등 대롱대롱 매달려 남들보다 나은 호사를 누려보겠다고 남을 시기하고 밟고 숱한 많은 경쟁자들을 매일같이 마음속으로 살인하면서 작금에 이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쌀 한되박에 웃고 울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행복했다. 진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억지로 등 떠밀려 살아야 하는 것이 사는 것일까 나 돌아볼 사이 없이 살아온 많은 날들이 왜 그렇게 밖에 살지못했느냐며 부메랑되어 귓전을 스쳐간다. 대부분 우리의 삶은 망상이었다. 쉬면 큰일날 것 같고 멈추면 죽을 것 같고 사실 오라는데도 별로, 갈 곳도 없으면서 썩은 동아밧줄을 부여잡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문제아닌 문제, 이유아닌 이유를 대고 억지 답을 정답이라고 우기고 오고보니 남은 것은 원점, 빈손 아니던가 ‘공수래 공수거’… 지금부터는 틈새에 끼어 오도가도 못하며 살아왔던것들에서 해방이 되어보자. 곡기 몇끼 끊는다고 가던 길 잠시 멈춘다고 굶어 죽거나 온 세상이 캄캄해지지 않는다. 가을이다. 유난히 가을비가 온 뒤에 쏟아지는 햇빛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세상도 가을로 접어들고 인간도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했듯이 이제 구태의연한 나를 벗어던지고 갇혀 살던 나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날게 하자 머뭇거리다보면 결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지금껏 나의 삶이 ‘나를 끌고 가는 너’에게 지배당한 채 시키는 대로 움직였던 ‘나’를 흔들어 깨우치게 하고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나’와 맞서 싸워 진정한 ‘자아’를 찾아주자. 그것이 내가 나에게 해야 할 숙제이자 사명 이다. 그것이 나에 대한 빚 갚음이다. 평생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 끌려 다녀야 했던 나는 일생을 고뇌와 번민과 불행이라는 늪에서 헤어 나온 적 있었던가 이제 그 삶을 방치한다면 결국 나는 나를 살인하는 ‘우’를 범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온것도 아니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산것도 아니기에 할 수 없이 살아왔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함이다. 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에게 할짓은 아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거한다. 대한민국은 3만불 시대임에도 행복지수가 세계 100위를 넘어섰고 부탄은 3천불도 안되지만 행복지수 1위 국가다. 왜일까? 행복의 잣대는 많고 적고 높고 낮음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의호 <편집국장 | 2017/09/2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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