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자는 나를 꺾는 것! 나의 최대의 적은 나, 자신 싸워야 할 적도 나 자신
인간이 숨쉬고 사는 것 자체가 힘에 부치는 일이다. 살면서 숫한 난관에 부딪히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도 많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에 대해 분노하고 그 대상을 꺾기 위해 때론 혈안이 될 때도 있다. 이는 너나없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잘못된 것이 나 때문이 아니고 모두 너때문이고 보면 나 외에는 모두가 적으로 치부케되고 그러다 보면 그 원인은 죽은 조상에게 까지 치닫게 된다. 이렇듯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나 억지 슬픔이 나를 지배하면 내 삶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반대로 기쁨과 희망과 소망이 내 마음에 가득하면 내 삶은 긍정적이 된다. 모두는 말한다. 이 대목에서…. 누구나 후자가 되길 바라지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렇다, 모두가 후자의 인생을 살고 싶고 후자 인생을 살지못하는 현실 때문에 분노속에 살아감이 맞다. 안되니까, 늘 채워지지 않으니까, 내뜻대로 되는게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이 안되고 왜 채워지지 않을까라는 숙제로 안고 사는 한 우리의 삶은 고달플 수 밖에 없다. 본래 우리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법인데 이를 채우려 해 고달플 수 밖에… 그리고 그 해답을 찾으려 하는 한 나는 내 주변의 수많은 친구, 형제, 심지어 부모도 원망의 대상이 되고 살인의 표적으로 삼게 된다. 사람은 각기 그릇이 다르다. 모양도 크기도 쓰임도 다르다. 이 사실을 빗대어 천태만상, 천차만별이라 하는데 왜 그 천태만상 속에 나는 이런 모양으로 태어났는가라며 자신의 환경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한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부정에너지로 상대를 파괴하게 된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긍정이나 부정도 외부의 침입(?)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돼 있는 인격에 의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육의 산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상대로 인성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학교가 경쟁을 부추기다가 경쟁의 결과로 초래된 학원폭력에 시달리고 경쟁에서 제외된 아이들이 범죄에 내몰리고 있어 뒤늦은 인성교육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 먹고 사는 일,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초점을 두고 지식함양에 올인함에 따라 작금의 상황에 이르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보니 밟히거나 지면 패자가 되고 패자의 끝은 암울한 미래가 기다린다는 현실적 절망감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서로 각기 다름을 교육에서 배우지 못함이다. 공부도 잘하고 못함을 인정하면 된다. 그것이 ‘다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법관이 될 수 없고 누구나 다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갈 수 없다. 내 마음속에도 분명 두개의 인격이 자리하고 있다. 한 마음안에 하나의 생각이 내재돼 있는게 아니라 항상 다름이 서로 다투며 산다. 결과는 나를 지배하는 그 어떤 힘이 선한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나를 끌고 가는 그 무엇인가가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지로 몰고간다. 후회할 것을 알아도 만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뜻대로 아닌 정반대의 길로 접어든다. 성경에 나타난 ‘선악과’라는 열매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분명 이 과일을 따 먹으면 ‘선과 악’을 알고 구분하게 된다. 인간은 조물주를 배신하고 선악과를 선택했다. 이 선악과는 지금의 나 자신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내 몸속에서 그 역할을 하고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분명한 것은 내가 나를 꺾어야 진정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내 생각이 옳고 내 판단이 의롭고, 내가 하는일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모두 내 중심이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악의 기준을 내가 결정하는 것은 내가 곧 신으로 등극하는 교만의 우를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내 생각을 믿고 나의 옳음을 믿고 내 잣대를 들이대고 모두를 심판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이 바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다. 선악을 내 마음속에서 몰아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생명과일이 존재하는 에덴동산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이순간 내 마음속 ‘선악’을 몰아내려면 내 마음대로 살아선 안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나의 의를 그릇되다 판단하고 그 어떤 행위도 멈춰야 한다. 그 옳음이 매순간 부메랑이 되어 내 삶을 피폐하고 병들게 하며 늘 분노와 원망으로 내 앞길을 가로 막는다. 용서와 화해와 관용 이 모두를 합하여 합일하면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사랑이 없다. 그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려면 사랑에 감전되는 길 밖에 없다. 우리 모두 차제에 사랑의 화신으로 덧 입혀지길 기원하는 바다. 지금 이 순간 부터라도 내가 손해나고 인내하고 남탓에 앞서 내탓이라 인정하자. 불현듯 솟구치는 상대에 대한 분노를 꺾어보자.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인내없는 결실은 도적질의 산물밖엔 없다.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것, 그것은 ‘나를 꺾는 것’이다. 꺾지 않고 얻는 것은 상처뿐인 참혹한 결과가 기다릴 뿐이다. 나의 최대의 적은 곧 나 자신이며 싸워야 할 적도 나 자신이다.
유의호 <편집국장 | 2016/09/06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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