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
이해관계에 따라 나를 좋아하는 이가 있고 싫어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내게 득이 되면 좋은 사람, 내게 실이 되면 나쁜 사람이 되게 마련이다. 이것을 인지상정이라 말해도 될까 싶다. 하지만 이해관계를 떠나 좋다, 싫다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이를 객관적 평가라 해야 하나. 이를 역설하자면 좋고 싫음은 제 눈의 안경이라는 점이다. 이유 없이 그냥 싫다. 주는 것 없이 밉다, 라고 하는 이들을 보면 이는 그들 시각이 정신적인 문제에서 기인하고 있음이다. 모든 이들의 생각은 자기중심에서 비롯된다.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정서가 있고, 그 색깔과 정서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천태만상, 천차만별의 인간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자기가 기준이다 보니 기준을 초과하거나 미달이면 이해관계없이 쉽게 매도한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어도 남의 이야기만 듣고도 결론을 지어버린다. 인간은 그래서 ‘유유상종’이라한다. 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끼리 만나고 소통한다. 그러고 보면 누구에게 밉다, 좋다 소리를 듣는 것에 예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내가 왜 그들의 대상이 됐을까 라는 생각도 어리석음이다.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 비를 좋아하는 사람… 그들의 싫고 그름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어쩌랴 내가 바람이라서 싫다는데… 그러나 좀더 많은 생각으로 자신을 수련시키거나 덕을 쌓은 사람은 입이 무겁다. 싫고 그름을 속단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그를 싫어하면 그도 나를 당연히 싫어한다는 것을 선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나는 싫어하면서 상대가 나를 싫다고 매도하면 분하고 화가 치밀고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를 이율배반의 논리라 하는 것 같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니가 하면 불륜’과도 같은 맥락이다. 참 우습다. 참 웃긴다. 역지사지에서 길을 찾는다면 지극히 당연한 실수를 하지 않을 법하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는 기준이 자신인지라 곧바로 부메랑이 될 것을 깨닫지 못하니 우습지 않은가. 미워하지 마라. 성경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자”(요한 1서 3:15)라 했다. 싫어하는 것이 발전하면 미워하는 것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인권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사람이 제일 싫은 것이 있다면 싫음을 당한다는 것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사람끼리 나누고 쪼개며 편가르기를 해서 그렇지 인간은 석가가 말했듯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했다. 이같이 귀한 존재를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라며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폄훼하는 것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이해관계로 살아간다면 더욱 소중히 그들을 보듬고 비록 이해관계 없는 이라도 서로 잘 되길 기도하고 위로 한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이것이 바로 성경의 꼭짓점이자 모든 종교의 부르짖음이다. 나밖에 모르는 근시적 삶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원시적 삶으로의 변화를 촉구한다. 모두가 내 형제 자매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이 평화가 오고 우리의 삶이 평안해진다.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표는 행복이다. 맘이 편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움이 없어야 한다. 싫고 좋고 편 가르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 한 내 삶은 늘 혐오스런 살인자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피를 나눈 혈육도 때론 서슴없는 미움의 대상이 됨을 유념해야 한다. 나를 끌고 가는 내 마음을 선 앞에 스스로 복종케해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이 되게 하자 남 말하듯이 말고 지금 내 모습에서 인간을 싫고, 좋음으로 단정하는 습관을 지워버리자. 그러려면 내 마음에 사랑의 씨를 뿌리고 그 싹을 키워야 한다.
유의호 <편집국장 | 2015/07/2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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