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일보]과학 관련 분야를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종종 SF영화나 소설을 소재로 삼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기술과 현재 실체화된 기술들에 대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얘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상황을 설명하며 “그때는 말이야~”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 순간 전형적인 꼰대의 말투를 풍자한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가 떠올라 학생들과 웃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질문을 한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꼰대라고 생각하나요?”
“나이 많은 사람이요”,“고집불통이요”,“아저씨요”… 여러 주장이 펼쳐진다. 학생들 표현의 공통점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사전적 의미에서 꼰대라는 단어는 어린 사람들이 아버지나 선생님 혹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뒤에서 비꼬아 부르던 은어였다. 자신보다 상위 존재에 대해 뒤에서 평가절하시켜 대상화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좀 과장하자면 강대국인 사람들 뒤에 “놈”자를 봍인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꼰대”라는 단어가 지금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무조건 맞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변화되고 있다. 자기 생각이 변하지 않거나 나아가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런 태도는 나이 많은 사람뿐 아니라 학교나 회사의 한두 살 많은 선배들에게서도 보인다. 그래서 최근 “젊은 꼰대”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꼰대 스러움은 타인과의 소통을 방해하고 사람 간의 벽을 쌓게 만든다. 이런 불통은 개인주의가 확산하는 현대의 개개인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고전에 궁즉변(窮則通),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변하고(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게 되고, 통하면 얻게 된다는 이 말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재에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과거의 관념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면 자신이 꼰대가 아닐까 의심해 봐야 한다.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기준이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될 수 있지만, 그 또한 새로운 정보와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변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말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인류의 진보는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진행된 발전보다 급격한 변화를 보여왔다. 그 속에서 오랜 시간 통용되며 굳건했던 수많은 논리들이 재편되는 과정을 겪었다. 산업혁명 이후 발 빠르게 산업화를 시도했던 국가들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산업화가 늦어진 나라들을 억압했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처럼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 변화를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전쟁을 겪고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통일된 생각으로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다양성 보다는 모두가 동일한 생각과 같은 사고방식이 효율적이였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에서 부터 미디어에 이르기 까지 한 세대를 특정 지을 수 있도록 요구되어 왔다. 그로 인해 산업화세대에서 베이비부머세대까지 특정 연령층들에 대한 특징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은 생각이 자유분방한 세대로 구분했다.
당시 20대의 특징을 특정 지을 수 없다는 의미인 X세대의 등장과 함께 사고의 다양성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후 밀레니엄세대와 MZ세대는 그 다양성이 확대되는 중이다. “남자가 말이야”, “여자가 말이야”, “학생답게”… 이런 말들을 들으며 자라왔던 사람들 중 생각의 변화가 없이 머물러 있을 경우가 가끔 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오면서 그 생각들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경험철학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는 계속 변화되고 있고 변화할 것이다.
세상은 4K 이상의 고화질 영상을 내보내는데 홀로 흑백 티비를 보면서 4K 화질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 과거에서 변화한 현재가 있듯이, 미래는 현재의 변화로 만들어진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마치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부정 당하는 느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Disavowed)이 아니라 진화(Evolution)다.
“소통을 꼭 해야 하는가?”이라는 질문엔 “그렇다”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뻔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크고 작은 모든 요소에는 타인과의 소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선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그때는 말이야~” 라고 말하면 꼰대라고 느끼지 않고, 윗세대의 과학기술과 생활환경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 기울일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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