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일보]80년대 일본의 ‘공동 통신’ 서울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한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가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써서 관심을 일으킨 바 있다.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인의 기질을 체험적으로 기술한 것인데 특히 한국의 기후가 주는 한국인의 기질을 예리하게 관찰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계절에서) 봄과 가을이 짧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든 인상이 강렬하다. 특히 봄은 춥고 긴 겨울이 끝나 화들짝 움츠린 어깨를 펴는 기분이다. 그것도 서서히 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봄이 왔다가 빠르게 가버린다. 올해도 개나리가 단숨에 활짝 피어나는 걸 보면서 과연, 그러니까 한국의 봄은 위태롭구나 하고 생각했다. 긴 겨울, 혹독한 추위에서 갑작스레 봄이 와서 짧은 시간에 확 피어나는 상황 속에서 시민들의 감정마저 한꺼번에 해방감이 밀려오기 때문에…”
그래서 4·19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노동 파업 등 한국의 굵직한 저항운동이 봄에 일어난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구로다 기자는 더 나아가 한국의 부정부패도 계절과 연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계절처럼 중간이 짧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유혹이 있으면 쉽게 낚아채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국인은 하나를 얻으면 그다음은 둘이 아니고 다섯까지를 바라며, 다섯이 주어지면 그다음은 아홉, 열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다. ‘적당히’ 만족하거나 ‘중간’쯤으로 참는 일은 없다. … 정쟁(政爭)은 정도껏은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현상, 즉 ‘적당히’ 또는 ‘중간쯤’이 통하지 않는 것은 한국의 계절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계절 중 추위와 더위의 중간 지대, 봄과 가을이 짧은 것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겪으며 그런 속에 어떤 속성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나 싶으면 금세 무더운 여름이 쫓아오고, 가을 단풍을 즐기는가 했는데 빠르게도 북풍이 불어닥치는 우리의 사계절.
그래서 우리 정치에는 ‘중도’가 없고 ‘동지’ 아니면 없애버려야 할 ‘적’이 있을 뿐이다.
조선 시대 그 참혹했던 사색 당쟁만 봐도 내 편이 아니면 무슨 모함을 해서라도 상대를 귀양 보내거나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통째로 ‘폐족’(廢族) 시켜버렸다. ‘중도’는 기회주의, 회색분자로 매도됐다.
봄과 가을이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최근의 정국만 봐도 그렇다. 중도가 없고 중간 지대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선서가 끝나자마자 퇴진 운동이 벌어진 것은 다른 민주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심지어 노동운동을 하는 민주노총까지도 지난 7월 2주간 총파업을 벌이며 윤 대통령 퇴진 시위를 전개했다. 그들은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을 대중화하는 방아쇠가 드디어 전국 동시다발, 촛불시위로 번진다’라고 선언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종교인들까지 거리로 나와 정권 퇴진을 외친다.
이제는 퇴진 운동에서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발전했다.
대통령뿐 아니라 장관 탄핵은 이제 습관처럼 돼버렸다. 이미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을 밀어붙였다가 6개월 가까이 행정 공백만 가져왔음에도 한덕수 국무총리,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 탄핵이 거론되는 국무위원이 다섯 명을 넘는다. 더 나아가 1년 6개월밖에 안 된 내각 총사퇴까지도 거론된다.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에 중도도 없고 중간 지대도 없다. 봄과 가을이 짧기 때문일까?
벌써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하늘은 파랗고 곧 단풍도 들 것이다. 그러나 그 가을은 빨리 사라지고 추운 겨울이 달려올 것이다. 이 짧은 우리의 가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단식과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로 벌어질 정치 투쟁으로 올가을은 춥고 불안하기만 하다.
정치는 없고 전쟁만 있는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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