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상대방과 말다툼끝에 불쑥 내미는 한마디가 있다. 당신 나이가 몇이오? 물론 나이를 확인하고저 하는 물음이 아니라 ‘철부지’라는 면박을 주기 위함이다. 이같은 면박을 당하면 누구나 너는? 으로 맞받아치며 으르렁 거리게 된다. 우리는 사실 자신의 나이를 까맣게 잊고 산다. 이는 망각이다. 일생을 망각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한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람쥐 체바퀴 돌듯 언제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살다보니 ‘나이가 몇이냐’는 면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 한번쯤 깊이 고뇌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휴가를 다녀온후 직장을 떠나는 이들이 가장 많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통계가 어떤 근거로 산출됐던지간에 일상에서의 탈출인 휴가를 맞아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새삼 자기의 위치를 확인한 결과이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출퇴근하며 일하는게 전부다. 각자 주어진 여건에 따라 땀흘리며 그대가로 돈을 벌어 현실을 꾸려나가게 된다. 먹어야 산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일생의 수식어를 달고 살아가야 한다. 바꾸어 말한다해도 ‘빵의 노예’일뿐이며 이빵은 단지 식욕의 충족이 아니라 부귀영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이들의 시간관념은 나이를 불문하고 배꼽에 맞춰져있기에 그틀을 깨고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휴가기간동안 용기를 내어 직장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일게다. 하지만 삶의 무게, 행·불행의 초점이 배꼽시계에 의해 결정되는한 그 삶은 언제어디에 있다해도 ‘꼬르륵‘거리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당신나이가 몇이오?”라고 누구에게 질문을 받기전에 자문자답해본다쳐도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그 묵묵부답의 해답은 누구나 식사시간 직전임을 모를리 없지만 이를 인정하고 싶지않고 존재의 초라함 때문에 상실감마져 뒤따르게 된다. 나이는 세월이다 하지만 어떤 세월을 어떻게 어디로 먹었는지 해법은 10진법으로 논할수 없다. 다만 주름살과 흰머리카락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 웃자라듯 쑥쑥 턱밑을 치고 오르는 자식들을 보면 비로서 실감할 뿐이다. 고장난 나침반은 목적지로 안내하지 못한다. 가장 불행한 삶은 목적없는 삶이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뜨고 저녁침상에 들때까지 일해야 된다는것 그것이 배꼽시계의 주문이라면 이것이 바로 “먹기위해 사는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결코 의식주에 있지 않음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동물적 본능 그 자체로 살아가다 최후를 맞게 된다. 인간은 신비스런 존재다. 살아움직이는 ‘神’이다. 영과혼과 육체를 동시에 소유한 ‘神’이야말로 완벽한 3위1체가 아닌가! 이 위대한 섭리를 저버린채 먹고 살기위한 악의 다툼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도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도 주지할 필요가있고 한발짝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이 ‘神’ 의 세계를 좌지우지 할수있다는 생각도 터무니없는것이 아님을 역산할수 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지금껏 배꼽시계를 떼어내지 못해 억조창생이 빵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기억하라. 기본적인 일말의 양심마져도 내팽개치고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내 욕심만 채우려 하는것은 어리석음이자 더불어사는 삶의 암적 존재들이다. 이제 육체의 배불림을 지시하는 혼의 사명을 참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영의 지시에 따라 육체의 환락에서 벗어나 영원히 사는 삶으로의 변화를 시도할 때다. 더불어 산다는것, 배꼽시계가 소리를 내는 인간에게서는 절대기대할수 없으며 차라리 굶주린 늑대를 훈련시키는게 쉬울것이다. 넌지금 어디로 가느냐? 라는 물음에 여기가 어디입니까? 라고 반문하는 자가 되지 말라.
유의호 <편집국장 | 2005/08/01 게재> <저작권자 ⓒ 시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